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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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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차별 강간 === [[소련군]]이 저지른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베를린 강간]]의 임펙트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동부전선]]의 국방군 역시 그보다 훨씬 더한 전방위적이고 잔혹한 [[강간]]을 자행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소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소련 민간인 여성들과 소련군 [[간호사]]와 간호병, 그리고 기타 여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힌 채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대부분 살해당한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국방군에 저항하던 여성 [[파르티잔]]은 아예 강간 후에 고문을 가한 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 스몰렌스크, 러시아 : 독일군 사령부가 장교들을 위한 매음굴을 개설하였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팔이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강제로 매춘부가 되었다. * 르비우, 우크라이나: 독일군이 공공 공원에서 옷 공장에서 일하는 32명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를 막으려 하던 사제 또한 살해했다. 독일군은 리비우에서 유대인 여성들 또한 강간했으며, 임신하면 쏴 죽였다. * 바리사우, 벨라루스: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75명의 여성들이 사로잡히자 독일군은 그 자리에서 36명을 죽여버렸다. 그 후 독일군은 16살 L.I.멜츠코바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집단으로 강간했다. 다음으로 끌려간 여성이 발견한 것은 표지판에 못박혀 죽어가는 멜츠코바였다. 독일군은 그 여성 앞에서 멜츠코바의 가슴을 잘라냈다. * 케르치, 크림 반도: 사로잡힌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다음엔 잔혹하게 죽였는데 가슴을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자르고, 안구를 파냈다.[* 구체적인 동기는 불명이나 독일군은 강간을 저지른 직후 피해 여성의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하여 죽이는 경향이 전쟁 내내 매우 두드러졌다.] 나중에 1941년 12월 케르치를 탈환한 소련군은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된 젊은 여성들의 몸뚱아리가 교도소 뜰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1942년 1월, 집단 매장터가 다시 조사됐는데, 바게로보 마을 외곽의 길이 1km, 너비 4m, 깊이 2m의 대전차호에 여성, 아이, 노인, 청소년 7000명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 있는 매장터를 발굴하였다. * 티흐빈, 러시아: 레닌그라드 주 티흐빈에서 포탄 파편에 부상당한 15세의 소녀 H. 콜레데츠카야가 독일군 병사들이 치료받던 이전에는 수도원이었던 야전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독일군 병사들에게 집단으로 강간당해 죽고 말았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KukvVnzxhWAC&pg=PA31&lpg=PA31&dq=%22In+the+town+of+Tikhvin+in+the+Leningrad+region,+a+15-year+old+girl+named+H.+Koledetskaya,+who+had+been+wounded+by+shell+splinters,+was+taken+to+a+hospital+(a+former+monastery)+where+there+were+wounded+German+soldiers.+Despite+her+injuries+the+girl+was+raped+by+a+group+of+German+soldiers+and+died+as+a+result+of+the+assault.%22&source=bl&ots=8o2oMKBfgi&sig=ACfU3U1T3Yv6JddOy-YBQMcl1v1Y_zD_dw&hl=ko&sa=X&ved=2ahUKEwjMvqfk-PSGAxVyhq8BHUoEAwAQ6AF6BAgLEAM#v=onepage&q&f=false|출처]] 무엇보다 국방군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련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장병들을 적극 적발 및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방침을 세웠고 그런 마당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고 성폭행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처벌이 있기도 했으나 가벼웠다. 따라서 독일 장병들은 마치 가로수의 열매를 따먹듯 점령지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그것을 마치 자랑거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 [*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감청했고 이를 이후에 독일의 역사학자 죙케 니첼 (Sönke Neitzel)이 해당 감청 기록을 집대성하여 정리했다. 해당 자료를 보면 독일군 포로들은 서로 낄낄대며 여성을 잔혹하게 강간하고 학살한 만행을 무용담처럼 떠들어댔으며 그들의 입으로 여러 끔찍한 사례가 언급된다.] >윌루스: "[[바르샤바]]에서 우리 장병들은 여자들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했다. 무작위로 첫 번째 방이 가득 찼고 그 사이 밖에서는 트럭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렸다. '''여자 한 사람마다 시간당 14명에서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마다 여자들을 교체했다. >뮐러: 제가 [[하르키우|하르코프]][* 현재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즉 당시의 소련 영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에 있었을 때, 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도시였고, 멋진 추억들도 많았죠. 거기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타간로크[* 현제 러시아 영토]에는 멋진 극장들과 멋진 해안 카페들이 있었죠. 전 트럭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딜 보든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파우스트: "오, 세상에!" > >뮐러: "정말 쭉 빠진 환상적인 소녀들이 도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차를 몰고 가서, 강제로 트럭에 태우고 마구 겁탈한 뒤 밖으로 내던졌죠.''' 이야, 정말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rape-murder-and-genocide-nazi-war-crimes-as-described-by-german-soldiers-a-755385-4.html|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https://en.wikipedia.org/wiki/War_crimes_of_the_Wehrmacht#Mass_rapes|1942년 독일 국방군 기록]]에 따르면 소련 한 국가에서만 1천만 건이 넘는 집단 강간과 간살(강간 후 살해)이 발생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독일 군인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여성 사이에 생긴 신생아 75만 명 가량을 독일인 혈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혼혈아들의 출생 증명서에 프레드리히, 루이즈 등의 독일식 이름을 중간에 끼워넣는 정책을 계획되었던 적도 있다. 슬라브인들을 아리아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종 청소가 목적이었다. 그나마 요식 행위로 한 얘기지만 뒤늦게 '독일인에 대한 보복 금지'를 공표한 스탈린과 기강 해이가 조직력 붕괴로 이어지기 전에 보복 행위자들을 즉결 처형하고 효수한 [[NKVD]]와 [[정치장교]]들 덕택에 동독인 전원이 소련인 부친을 가지진 않았다. >니빔: "이 말을 안 할 수 없군요. 우리가 프랑스에서 한 짓이 언제나 떳떳한 건 아니었습니다.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우리 저격병들이 술집 한가운데에서 여자들을 붙들어 테이블 위에 눕히고 끝장내는 걸 보았죠. 결혼한 여자라도 상관 안 했어요! >슐트카: "(...)공수부대원들이 이탈리아에서 어느 집에 침입해 남자 둘을 죽였어요. 두 남자 모두 아버지였죠. 한 사람에겐 딸이 둘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두 딸을 강간했지요. 정말 처절하게 능욕하고 죽여버렸어요. 거기엔 이탈리아식의 커다란 침대들이 있었는데, 그 다음에 놈들은 죽은 여자들을 침대에 던지곤 또 거시기를 꽂았죠. '''[[시간(동음이의어)#s-2|죽은 여자들을 또 한 번 짓밟은 겁니다.]]''' 서부전선인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지에서는 독일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강간 등의 대민 범죄를 단속하였기에 독일군의 강간과 학살로 아비규환이 된 동부전선에 비해 강간 피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으나[* 물론 전쟁 말기 이전에도 서부전선에서의 강간은 분명히 자행되었으며 독일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형식적인 처벌은 했다. 그러나 강간죄가 군법상 총살형까지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죄목만이 대부분 적용되어 처벌은 무겁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른 병사를 다른 지역이나 부대로 전출시키는 데에 그쳤다.][*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독일군은 폴란드인 여성을 상대로 수많은 강간을 저질렀으나 그 중 기소된 사례는 고작 '''1건'''이였는데 이는 부스코즈두루이(Busko-Zdrój)에서 유대인 여성 1명을 독일군 병사 3명이서 집단 강간한 사례였는데 이마저도 황당하게도 피해자가 유대인이였다는 이유에서 기소되었던 것이였으며 죄목 역시 강간이 아닌 '''인종 모독죄(Rassenschande)였다.'''][* 물론 강간죄로 적발되어 즉결처형된 병사가 존재하기는 하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총살형을 선고받더라도 이후 감형되어 형벌 부대에 보내지거나 [[영창]]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독일군 수뇌부가 자체적으로 처형한 병사들의 죄목은 대부분 탈영(적전 도주 포함)이나 명령 불복종이였으며 황당하게도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같은 전쟁 범죄 행위의 수행을 거부한 병사를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여 처형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처형 사례는 일본군에게서도 다수 존재한다.] 전쟁 말기, 1944~5년경에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며 군기강이 해이해지고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서부전선에서도 강간율이 치솟았으며 이에 수뇌부도 사실상 손을 놓고 처벌을 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강간과 동시에 민간인 및 포로 학살, 약탈 및 방화가 무자비하게 자행되었고 전례 없던 대민 범죄에 반발한 서부 전선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지의 민간인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급증하는 계기를 불러왔다. 독일군의 강간은 전후에도 여파를 남겼는데 독일에게서 해방된 서부 유럽 국가에서는 강간 피해 여성들이 독일군과 잔 여성으로 매도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린치당하는 [[2차 가해]]가 벌어지면서 그 폐해가 매우 심각했다. [* 프랑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덴마크 역시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해방된 직후 독일군과 잔 여성들을 색출하며 린치를 가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를 가하였는데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마저도 이러한 피해를 당하면서 사회적 병폐가 매우 심각했다. [[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2606992/Graphic-monochrome-images-liberated-Denmark-kidnap-squads-hunted-abused-women-slept-Germans-end-WWII.html#comments|관련 기사]]] [[하마르]] 지역 기록 보관소의 기록에 따르면 [[노르웨이 침공]] 과정과 그 직후에 [[하마르]] 지역에서 독일군이 현지의 [[노르웨이]] 여성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대며 강간을 저질렀고 지역 경찰이 피해 여성의 신고를 묵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는 독일군이 인종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분한 북서유럽 국가에서조차도 강간이 발생했으며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https://www.nrk.no/innlandet/tyske-soldater-voldtok-norske-kvinner-i-1940-1.12299848|관련기사]] 무차별적인 강간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여성들을 반강제로 동원하여[* 전쟁 이전부터 자발적인 매춘부였던 여성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일자리를 알아봐준다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속여 매음굴에 가두었으나 그럼에도 인원이 충당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을이나 길거리에 들이닥쳐 눈에 띄는 여성을 닥치는대로 강제로 끌고가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와 상당히 유사한 시스템의 위안소(또는 매음굴)을 운용하기도 했다. 피해 여성은 대부분은 소련,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이었으나 나치 독일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한 서북유럽 출신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등]. 독일군 수뇌부는 장병들간의 [[동성애]]를 막고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으로 위안소를 도입했으며 위안소를 이용하는 장병들에게 [[콘돔]]이나 성병 예방 키트, 설문지를 보급하고 장병들에게 위안소 이용을 '권장'하는 등 매우 시스템적으로 위안소 체계를 운용하였으며 독일군 장병들이 남긴 수기에도 해당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급료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하루에 한 명의 여성이 수십 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으며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마취 없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켰다. 성병이나 임신이 발생했을 경우 대부분 즉각 살해되었다. 전후 독일군 위안소에서 살아돌아온 소수의 여성들마저도 '독일군과 몸을 섞은 불결한 여성' 취급을 받아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이는 사회의 멸시와 냉대를 두려워한 피해 여성들이 전후에도 피해 사실을 극력 함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위안소 운용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게 현대에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성 범죄에 관해서 무려 400쪽 분량으로 다룬 권위적인 논문으로 ''Victims, Heroes, Survivors: Sexual Violence on the Eastern Front During World War II''가 있다.미네소타 대학의 Wendy Jo Gertjejanssen이 쓴 것으로 인터넷에 무료로 [[http://www.victimsheroessurvivors.info|공개되어 있다]](최하단의 full text 클릭). 단순히 강간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음굴 같은 주제도 다루었다. 내용이 매우 어려우나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 보면 좋은 논문이다. 국방군은 슬라브인을 인간으로 안 본 것이 아니고 단지 위대한 아리아인인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봤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타인종과의 성접촉을 수간으로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라서 결코 좋게 보기 힘들며, 그에 따라 결코 나치 독일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도 없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독일의 전쟁범죄, version=263, uuid=eb9c7486-2bcd-436b-979e-38aa4d41e894, paragraph=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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